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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어디까지 사랑해야 하는가, 언제까지 사랑해야 하는가 2.

by Church, The Bridge 2026. 7. 6.

한 영혼을 주님처럼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문득 질문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사랑해야 하는 걸까요?
적어도 나를 존중하는 사람까지일까요?
나를 속이지 않는 사람까지일까요?
아니면 적어도 나를 해치지 않는 사람까지일까요?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살다 보면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납니다.
거짓말을 반복하는 사람.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
나를 곤경에 빠뜨리고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
요셉의 형들처럼 나를 팔아넘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까지 사랑해야 할까요?
조금 더 솔직해지면 또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언제까지 사랑해야 할까요?
한 번 용서하면 될까요?
두 번이면 충분할까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태복음 18:22)
예수님은 숫자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한계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에도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정말 끝없이 참아야 한다는 뜻일까요?
성경은 그보다 더 깊은 곳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사랑의 기준은 상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아직 죄인 되었을 때'라는 말씀 앞에서 저는 멈추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변한 후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회개한 후 사랑하신 것도 아닙니다.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하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인이었을 때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대상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영혼을 주님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실 만큼 사랑하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랑이 죄를 묵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악을 선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한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밀어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발도 씻기셨습니다.
배신을 모르셔서가 아닙니다.
알고도 사랑하셨습니다.
베드로를 회복시키셨습니다.
부인을 모르셔서가 아닙니다.
알고도 다시 맡기셨습니다.
십자가에서는 자신을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기준은 분명합니다.
어디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자리까지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사랑을 멈추지 않으신 그때까지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나 같은 사람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길을 배울 수 있습니다.
결국 한 영혼을 주님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내 사랑의 크기를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삶입니다.

"어디까지 사랑해야 하는가를 묻기 전에, 예수님께서 어디까지 나를 사랑하셨는지를 먼저 보십시오. 언제까지 사랑해야 하는가를 묻기 전에, 예수님께서 언제 사랑을 멈추셨는지를 먼저 생각하십시오. 십자가는 두 질문에 하나의 답을 줍니다. '끝까지.'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이며, 우리가 한 영혼을 사랑해야 하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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