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가다 보면 마음속에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한 영혼을 주님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어디까지일까요?
구원받은 사람까지일까요?
나와 잘 맞는 사람까지일까요?
적어도 예의는 지키는 사람까지일까요?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살다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납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거짓을 말하는 사람.
실수를 넘어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상처를 남기며, 심지어 올무를 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까지 사랑해야 할까요?
솔직히 말하면 제 믿음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성경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동생을 시기했습니다.
시기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요셉을 구덩이에 던졌고, 노예로 팔았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무너뜨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용서받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뒤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세기 50:20)
요셉은 형들의 죄를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형들의 죄보다 더 크게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미움에 붙잡히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질문은 남습니다.
정말 누구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44)
이 말씀은 우리의 상식을 넘어섭니다.
우리는 사랑할 이유가 있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할 이유가 없는 사람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십자가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예수님께서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
원수 되었던 사람,
죄 가운데 있던 사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십자가는 사랑의 대상에 한계가 없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한 영혼을 주님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죄를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묵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진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한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밀어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한 영혼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의 현재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이루실 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깊이 알게 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씩 배우게 됩니다.
결국 한 영혼을 주님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랑하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기준은 내 감정이 아닙니다.
내 상처도 아닙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내가 용서받은 사람이었고,
내가 끝까지 사랑받은 사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은,
비로소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씩 닮아 갈 수 있습니다.
"한 영혼을 주님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실 만큼 사랑하신 사람을 나도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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