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갑자기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분노보다 먼저 찾아오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속고 있다.'
'내가 지금 이용당하고 있다.'
'나만 손해 보고 있다.'
그 생각이 마음을 붙잡는 순간,
분노는 순식간에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그때부터 사람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모든 말이 공격처럼 들리고,
모든 행동이 의도적으로 느껴집니다.
분노는 사건보다 해석에서 시작됩니다.
성경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요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크게 화를 냈습니다.
신기합니다.
악한 도시가 회개한 것은 기뻐할 일인데,
요나는 분노했습니다.
왜였을까요?
자신이 틀린 사람이 된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의가 무너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손해 봤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요나에게 묻습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은 니느웨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으셨습니다.
요나의 마음을 먼저 보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분노도 비슷합니다.
분노는 대부분
**'내 것'**에서 시작됩니다.
내 시간.
내 노력.
내 명예.
내 권리.
내 손해.
그래서 '내'가 커질수록 분노도 커집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억울한 일을 가장 많이 당하신 분이셨습니다.
거짓 증언을 들으셨고,
배신을 당하셨고,
침 뱉음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은 억울하지 않으셨던 것이 아닙니다.
억울함보다 아버지의 뜻을 더 크게 보셨습니다.
여기에 복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분노는 내 권리를 붙잡을수록 커집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뜻을 붙잡을수록 커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에베소서 4:26)
분노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분노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결국 분노를 이기는 방법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다시 해석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렸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사건이 아니라 해석이었습니다.
분노는 "사람이 내 인생을 망쳤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은 아직도 내 인생을 다스리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마음속에 분노가 올라올 때마다 한 가지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묻습니다.
"정말 하나님도 그것을 빼앗기셨는가?"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셨습니다.
내가 손해를 본 것 같아도,
하나님은 손해 보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속은 것 같아도,
하나님은 속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분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다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손해를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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