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답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는지.
왜 나는 이 사람을 만나야 했는지.
왜 기다림은 길고, 응답은 늦은지.
왜 어떤 사람은 쉽게 살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늘 힘겨운 길을 걷는지.
우리는 질문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경험을 쌓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깨닫게 됩니다.
질문 하나에 답을 얻으면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는 것을.
성경에도 평생 하나의 질문을 안고 살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질문했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입니까, 부모입니까?"
사람들은 원인을 알고 싶었습니다.
누구의 잘못인지,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과거를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미래를 보여 주셨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기보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늘 이유를 알고 싶어 합니다.
왜 실패했는지.
왜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왜 내 삶은 이렇게 흘러가는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유보다 더 큰 것을 주십니다.
예수님 자신을 주십니다.
맹인의 가장 큰 문제는 눈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눈을 뜬 뒤 그가 가장 먼저 보게 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적의 결론은 시력의 회복이 아닙니다.
예배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내 질문 하나하나에 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질문보다 크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조급함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빨리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노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억울함이 풀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용서의 길을 여셨습니다.
가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예배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드릴지를 고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자신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씩 알게 됩니다.
내 삶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이 많습니다.
왜인지 모르는 일도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시간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모든 질문의 답을 먼저 구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먼저 바라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나면,
질문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질문을 붙들고 살아갈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모든 문제를 즉시 해결해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보다 먼저 자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삶의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삶의 모든 질문 앞에서 "내가 여기 있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그 사실 하나면 충분합니다.
모든 답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모든 답이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걷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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