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만으로 충분합니다.
아무도 내 곁에 서지 않았을 때(9월20일 주일설교 요약) 본문
본문: 디모데후서 4장 9–18절
요즘 저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이제 혼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이 꼭 혼자 사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이 있습니다.
직장에 가면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에도 다닙니다.
휴대전화에는 수많은 이름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말합니다.
“저는 혼자입니다.”
아마 우리가 말하는 ‘혼자’라는 것은 단순히 내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뜻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혼자일 수 있습니다.
가족과 한집에 살면서도 혼자일 수 있습니다.
교회에 수백 명이 함께 예배드리고 있는데도 혼자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 말은 이런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정말 누군가를 필요로 했을 때, 내 곁에 서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인생의 마지막 무렵에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편지를 읽다 보면 의외로 아주 평범한 말들이 많이 나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조금 뒤에는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드로아에 두고 온 겉옷도 가져오라고 합니다.
책도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편지의 거의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말합니다.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저는 이 말이 참 좋습니다.
바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이라고 하면 뭔가 다른 사람처럼 생각합니다.
복음을 위해 평생을 살았고, 교회를 세웠고, 감옥에도 갔고, 매도 맞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인생의 마지막에도 흔들림 없이 혼자 모든 것을 감당했을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사람이 보고 싶었습니다.
디모데가 보고 싶었습니다.
마가도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추운 겨울을 앞두고 겉옷도 필요했습니다.
읽던 책도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자기 곁에 와주기를 기다렸습니다.
복음의 사도 바울의 마지막 모습이 생각보다 참 인간적입니다.
“와 주었으면 좋겠다.”
저는 이 말을 우리가 오래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이상한 강함을 배우기도 합니다.
“하나님만 있으면 됐지.”
“사람에게 기대하면 안 돼.”
“믿음이 있으면 혼자서도 견뎌야지.”
물론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을 좋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지음받았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그리운 것은 죄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전화하고 싶은 것도 믿음 없음이 아닙니다.
힘든 날에 누군가 내 옆에 앉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도 신앙의 실패가 아닙니다.
바울도 말했습니다.
“디모데야, 빨리 와라.”
그런데 바울 주변을 조금 자세히 보면 또 다른 것이 보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데마처럼 떠난 것은 아닙니다.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갔습니다.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습니다.
두기고는 바울 자신이 에베소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여전히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이것도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외로울 때 마음은 쉽게 모든 부재를 하나의 말로 해석합니다.
“다 나를 떠났어.”
“아무도 나를 생각하지 않아.”
“이제 내게는 아무도 없어.”
그런데 바울의 마지막 모습을 보니 사람의 부재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정말 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의 사명을 따라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보낸 사람도 있습니다.
여전히 곁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불러야 할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 지금 내 곁에 없다는 것과 그 사람이 나를 버렸다는 것은 반드시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외로운 사람에게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주변에 사람 많잖아요.”
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바울에게도 누가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조금 뒤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누가는 있었는데 왜 바울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을까요.
아마 이런 뜻일 것입니다.
“내가 정말 누군가 필요했던 바로 그 순간, 내 곁에 서준 사람이 없었다.”
그곳은 법정이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걸려 있는 자리였습니다.
누군가 한 사람만이라도 함께 서주었으면 좋았을 그 순간에 아무도 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숫자로 외로움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친구가 백 명이어도 혼자일 수 있습니다.
가족이 있어도 혼자일 수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혼자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아느냐가 아니라,
내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졌을 때 그 곁에 함께 서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사람이 또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38년 동안 병을 앓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런데 그 사람의 대답이 이상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낫고 싶으냐고 물으셨는데 그는 자기 곁에 사람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오랜 병보다도 그의 입에서 먼저 나온 말이 그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도와줄 사람도 없습니다.
저는 이것도 고립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립은 단지 쓸쓸한 감정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함께 감당해 줄 사람이 없는 상태.
병원에 가야 하는데 같이 가줄 사람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몸이 아픈데 돌봐줄 사람이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무너지고 있는데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모릅니다.
밤새 무서운 생각과 싸우면서도 전화할 사람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아픈 것은 그런 사람이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교회 안에 있던 헬라파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서 빠졌습니다.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예배 공동체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봄에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사도들은 그 과부들에게
“섭섭해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교회가 자기 모습을 돌아보았습니다.
사람을 세웠습니다.
돌봄의 방식을 고쳤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고립은 고립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혼자 지낼까?”
라고 묻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왜 저 사람이 혼자 견디도록 두었을까?”
그런데 바울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더 깊어집니다.
아무도 자기 곁에 서지 않았던 그 법정을 떠올리며 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셨다.”
저는 이 ‘그러나’를 너무 빨리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통받는 사람 앞에서 ‘그러나’를 너무 빨리 말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떠났지만 하나님은 계시잖아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너무 빨리 말하면 앞의 아픔을 지워버릴 수 있습니다.
사람이 떠난 것은 아픈 일입니다.
내가 가장 필요로 했던 순간에 아무도 오지 않은 것은 아픈 일입니다.
평생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어려울 때 아무도 보이지 않으면 마음속에서 이런 질문이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온 것인가.”
성경은 그 말을 막지 않습니다.
바울도 말했습니다.
“아무도 내 곁에 서지 않았다.”
그 말을 충분히 한 다음에야 바울은 다음 문장을 말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내 곁에 서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임재인 것 같습니다.
빈 의자가 사실은 비어 있지 않았다고 우기는 것이 아닙니다.
떠난 사람이 사실은 떠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도 오지 않은 밤을 아무렇지 않은 밤으로 바꾸는 것도 아닙니다.
그 빈자리 때문에 내 존재 전체를 ‘버려진 사람’이라고 해석하지 않도록 붙드시는 것입니다.
그날 내 곁에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과
내가 세상에서 버려진 존재라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17절을 끝까지 읽으면 한 가지가 더 보입니다.
주님께서는 바울 곁에 서서 그저 마음만 달래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이 저는 인생의 후반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참 중요하게 들립니다.
사람이 하나둘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자녀가 떠납니다.
직장에서 물러납니다.
명함에서 직함이 사라집니다.
예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가 왔는데 이제 휴대전화가 조용합니다.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어느 날 보니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갑니다.
그때 사람의 감소가 삶의 의미의 감소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제 내 역할이 끝났나 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구나.”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지?”
그런데 인생 마지막의 바울을 보십시오.
사람은 줄었습니다.
힘도 줄었을 것입니다.
갈 수 있는 곳도 줄었습니다.
자유도 빼앗겼습니다.
죽음도 가까워졌습니다.
그런데 사명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사람을 부릅니다.
마가를 데려오라고 합니다.
책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겉옷도 가져오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합니다.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시간을 살아냅니다.
사람이 줄어드는 것과 내 삶에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어쩌면 인생 후반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대한 일을 새로 맡기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전화해야 할 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읽어야 할 책 한 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써야 할 글 한 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할 오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삶이 작아졌다고 해서 삶의 의미까지 작아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시편 88편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88편은 참 이상한 시편입니다.
많은 탄식시는 울다가도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 시편은 그렇지 않습니다.
친구가 떠납니다.
가까운 사람도 멀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밝아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어두운 기도를 지우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모든 외로움이 이번 주 안에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직 디모데가 오지 않았습니다.
마가도 오지 않았습니다.
전화도 오지 않았습니다.
관계도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기도해도 상황은 그대로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조금만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좋은 사람을 보내주실 겁니다.”
라고 함부로 약속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기도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바울처럼
“그러나 주께서 내 곁에 서셨습니다”
라고 고백할 힘이 없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아직 외롭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그립습니다.”
그것도 기도입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를 조금 더 앞에서 읽다 보면 한 사람이 나옵니다.
오네시보로입니다.
많은 사람이 바울에게서 돌아섰을 때 그는 달랐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왔을 때 바울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냥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필요하면 연락하세요.”
그가 찾았습니다.
부지런히 찾다가 결국 바울을 찾아냈습니다.
저는 이 사람이 자꾸 마음에 남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오래 혼자 있었던 사람 가운데는 이제 도움을 청할 힘조차 없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면 연락하세요.”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연락하지 못합니다.
누구에게 연락해야 할지도 모르고,
괜히 폐를 끼칠까 봐 망설이고,
한두 번 거절당한 뒤에는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오네시보로 같은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을 찾는 사람.
몇 주째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사람.
“필요하면 말하세요”에서 멈추지 않고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먼저 묻는 사람.
그래서 오늘 말씀은 외로운 사람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한편에서는
“외롭다고 말해도 됩니다.”
라고 말씀하시고,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혹시 네 곁에 아무도 자기 곁에 서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느냐?”
그 사람이 멀리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한집에 살고 있는 배우자일 수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은 형제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늘 같은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다 가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매일 직장에서 만나면서도 한 번도 마음을 물어보지 않았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 그 사람이 나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괜찮습니다.
바울처럼 말해도 됩니다.
“와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연락해도 됩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해도 됩니다.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마음에 떠오른다면 이번에는 우리가 먼저 연락해도 좋겠습니다.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 사람에게 정답을 주지 못해도 됩니다.
어쩌면 필요한 것은 그저 곁에 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평생을 살고 난 뒤 기억한 것은 대단한 말 한마디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자기 곁에 있었는지,
누가 떠났는지,
누가 다시 와주기를 바라는지,
그리고 아무도 서지 않았던 그날 누가 자기 곁에 서셨는지를 기억했습니다.
“아무도 내 곁에 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문장이 바울 인생의 마지막 문장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내 곁에 서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울을 혼자 견디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다시 디모데를 불렀습니다.
마가를 불렀습니다.
사람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은 삶을 계속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마음에 남겨두고 싶습니다.
빈 의자가 당장 채워지지 않아도
그 빈 의자가 내 인생 전체가 되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줄어들어도
살아갈 이유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받은 이 은혜가
혼자 앉아 있는 또 다른 한 사람의 곁에
조용히 의자 하나를 가져다 놓는 삶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거창하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주님, 저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외롭다면 외롭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청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사람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제 인생 전체를 버려졌다고 해석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제 주변에 아무도 자기 곁에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손을 내밀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제가 먼저 기억하게 하시고,
먼저 찾아가게 하시고,
해답을 주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 곁에 서게 해주십시오.
주님께서 바울의 곁에 서셨던 것처럼,
오늘 누군가의 곁에 저도 서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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