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만 하는 사람
오전 급식 배송 일을 마치면 저는 곧장 동탄중앙도서관으로 갑니다.
저녁 출근 전까지 제게 주어진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원래 책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좋아한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입니다. 가끔은 도서관에 있는 20만 권의 책을 모두 읽어 버리겠다는 허황된 생각까지 합니다. 그래서 저녁 일이 있기 전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읽습니다.
도서관에는 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
노트북을 펴놓고 공부하는 청년들.
자격증을 준비하는 직장인들.
그런데 그들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백발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입니다.
신문을 읽는 분.
노트를 펼쳐 놓고 글을 쓰는 분.
두꺼운 책을 읽는 분.
무엇인가를 공부하는 분.
어떤 분은 저보다 훨씬 더 열심히 책을 읽습니다.
가끔 그분들을 바라봅니다.
어떤 젊은 시절을 살았을까.
어떤 직업을 가졌을까.
무슨 사연으로 이 도서관까지 오게 되었을까.
집에 있기 답답해서일 수도 있고, 가족들의 눈치가 보여서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이루고 싶은 꿈이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자격증을 준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단지 늙어가는 시간을 조금 더 의미 있게 보내고 싶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모두 같은 공간에 앉아 있습니다.
인생의 후반전이라는 도서관에.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개인 소파처럼 생긴 의자에 앉아 있던 백발의 할아버지 한 분이 깊이 잠들어 계셨습니다.
코 고는 소리가 꽤 컸습니다.
도서관 전체에 들릴 정도였습니다.
신기하게도 젊은 사람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이어폰을 끼고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자기 할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같은 노인이 되어 가는 사람으로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잠을 자려면 집에서 자야지.'
'이렇게까지 하면 추태 아닌가.'
'늙음이 추해져서는 안 되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할아버지의 사정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몸이 아픈지.
혼자 사는 사람인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인지.
그날 하루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저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한 사람의 늙음을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요즘 저는 하루에 세네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하는 날들이 많습니다.
몸은 피곤하고.
생각은 많고.
삶은 여전히 분주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저 역시 그 도서관 의자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오래 잤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크게 코를 골았는지도 모릅니다.
제 코 고는 소리에 제가 놀라서 깨어났습니다.
순간 얼굴이 뜨거워졌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습니다.
혹시 누가 보았을까.
혹시 누가 불편해했을까.
그리고 그때 문득 그 백발의 할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그분도 어쩌면 이렇게 놀라 깨어났을지 모릅니다.
그분도 어쩌면 부끄러웠을지 모릅니다.
그분도 어쩌면 잠이 부족했던 사람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날 저는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은 예외인 것처럼 다른 사람을 평가합니다.
나는 이해받아야 하고.
남은 평가받아야 합니다.
나는 사정이 있고.
남은 게으른 것입니다.
나는 피곤한 것이고.
남은 추한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교만한 일인지 뒤늦게 알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광적으로 읽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많이 읽는다고 반드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많이 아는 것과 많이 이해하는 것은 다릅니다.
독서가 사람을 깊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책은 많이 읽는데 사람을 읽지 못할 수 있습니다.
문장은 이해하는데 인생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날 도서관에서 저는 한 권의 책보다 한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읽기만 하는 사람보다 이해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많이 아는 사람보다 오래 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언젠가 저 역시 도서관 한구석에서 잠이 드는 백발의 노인이 될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날 누군가가 저를 보며 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다른 사람의 늙음을 쉽게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도서관에는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조용히 잠이 듭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피로를 안고 도서관에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을 읽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버티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에게 판단받지 않고 잠시 머물기 위해.
저는 오늘도 책을 읽으러 도서관에 갑니다.
하지만 이제는 책보다 사람을 먼저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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